1. 아현동의 유래
아현(阿峴)계 동명(洞名)은 육전조례(六典條例)등 고종조(高宗朝)때 많이 보이는데, 그 중 고종 31년(1894) 갑오경장때 종래 한성5부의 부(部)로 고칠 때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한성의 동·남·중·서·북의 5서중 서서반송방(西署 盤松坊)과 북서 연희방(北署 延禧坊)으로 아현의 여러 동명(洞名), 계명이 나타남을 볼 수 있다.
견한잡록(遣閑雜錄 : 선조조 문인 )에서 우리 지방 기로(耆老)의 모임이 둘이 있다. 하나는 아이현(兒耳峴)의 여러 늙은이(고개 아래 거주하는 이들)들이 경진년(선조 13년, 1580) 가을부터 모임을 가지다가 임진년 여름에 와서 난리를 만나 흩어졌는데 매달 각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가지며 활쏘기를 하고 혹은 바둑 두고 시를 지으며 즐겼다.
마포구 아현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아기고개, 아이고개, 애고개, 애우개, 한자명으로 兒峴, 阿峴, 阿耳峴이라고도 했으며, 떡전고개, 병시현이라고도 하였다. 이 고개 이름 유래는 세 종류가 있다.
하나는 남쪽의 만리현과 서북쪽의 대현이라는 두 큰 고개 중간에 있는 작은 고개이므로 ‘애고개’가 ‘애오개’ 또는 兒峴(아현)이 阿峴(아현) 등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옛날 도성에서 서소문을 통하여 시체를 나가게 하였는데 아이 시체는 이 고개를 지나서 묻게 하였으며, 현재 아현동 산7번지 일대에는 兒塚이 있었는데, 곧 아이 시체가 넘는 고개라 하여 애고개 등으로 부르다가 애오개로 변했다는 것이다.
셋째는 풍수지리설로, 이수광의 ≪지봉유설≫ 등을 참고하면 도성의 진산이 부아악(삼각산)인데 그 아이가 달아날 의사가 있으므로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 남쪽의 산을 벌아현(남산), 모악에서 서남쪽의 산을 병시현이라 이름 지어 아이가 달아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그중 벌아령은 아기를 못나가게 막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래어 머무르게 하는 의미로 떡전고개라고도 하였는데, 곧 아기를 달래는 고개이므로 아현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넷째는 풍수설과도 연관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성(서울)의 주산(主山)을 부아악(負兒岳, 북한산)이라 불렀는데 이 아이[負兒]가 달아나는 것을 막기 위해 서쪽에 있는 산을 모악(母岳), 남쪽 산을 벌아봉, 모악에서 서남쪽 산을 병시현(餠市峴)이라 칭하게 되었다. 벌아봉은 아이를 못떠나게 하는 의미이고, 병시현은 떡으로 달랜다는 뜻인데 병시현이 바로 아이를 달래는 고개인 ‘아현(兒峴)’이었다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학자들의 고증이나 백과사전에는 충정로에서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의 모습이 아기를 업은 엄마의 모습이라 하여 ‘애오개’ 또는 ‘애우개’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성 4대문과 그 사이의 4소문 가운데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성밖으로 갖다 버리는데 사용하는 문은 주로 서소문(西小門)과 광희문(光熙門)인데 이 가운데 서소문은 서북쪽 지역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며 광희문은 동남쪽 지역 거주민들이 주로로 이용하였으므로 일명 시구문(屍口門) 혹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다.
서소문 밖의 시체매장지는 만리재·애고개와 와우산 등이 이용되었고 이 가운데서도 애고개는 특히 아이들 시체를 많이 매장했기 때문에 명칭이 붙었다. 그런가 하면 만리재가 너무 길고 높아서 마포나루 쪽으로 가자면 한나절 이상은 족히 걸리므로 이보다 서북쪽에 있는 작은 고개를 넘기가 쉽다는 뜻으로 만리재를 큰 고개라 한데 비해서 아이 만큼이나 작은 고개라는 뜻에서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고려시대의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제도를 이어받아 1414년9월에 활인원(活人院)으로 개칭하면서 기구를 강화하였다. 그후 실질적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여 유명무실하던 것을 영조때 부활시켜 활성화되었는데 1882년에 폐지되고 그 후 이사업은 혜민서(惠民署)업무와 통합되면서 제중원으로 이어졌고 다시 1905년에 설립된 대한적십자병원으로 계속되었다.
아현동의 풍습으로는 매년 정원 보름에 행하던 석전(石戰)을 들 수 있다. 변 전(邊戰) 혹은 편싸움이라고도 하는데 돌이나 몽둥이를 들고 싸우는 싸움이다. 삼문(三門)밖과 아현사람들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쫓고 쫓기면서 행하는 일종의 풍습인데 삼문밖의 주민이 이기면 서울부근에 풍년이 들고 아현이 이기면 8도에 풍년이 든다고 해서 삼문밖의 사람들도 아현쪽으로 붙어 아현패가 이기도록 하였다. 도성과 마포나루가 이어지던 길목에 있던 아현을 전국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싸움의 함성으로 천지가 진동하는데 싸움에서 혹시 부상을 했다 하더라도 상관치 않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어느쪽에서도 변상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예 정월 보름날은 다른길로 피해서 다녔다고 한다.
「서활인서터」
아현초등학교와 아현중학교 직업학교 자리에는 고려때의 '동서대비원' 제도를 이어받은 빈민의료기관인 '서활인서'가 세워져 성안 사람들의 질병치로는 물론 일대 빈민의 병을 치료하던 곳이었다.
여우고개
아주부동산 권정범에 의하면 현재는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지만, 부동산이 있는 656번지에서 이대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여우가 살았다 해서 여우고개라 했다. 예전에는 이곳에 사람이 살지 않았고,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개바위
산7번지 꼭대기에서 염리동과 경계를 이루는 곳에 예전에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져 온다.
‘귀향 가는 주인을 기다리다 바위가 된 충성스러운 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옛날 조선 시대 때 마을의 어느 대감이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때 그 대감이 기르던 개가 대감이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고 귀양가는 모습을 언덕 위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마포나루에서 대감을 태운 배가 떠난 후에도 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충성스러운 개는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귀양간 대감을 기다렸다. 결국 개는 그 언덕 위에서 죽었고, 죽은 개는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2. 아현동의 형성
1) 산 7번지
아현 시장에서 4번 마을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올라가면 산7번지가 나온다. 산7번지는 조사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며 아현동의 꼭지점 같은 곳이다. 현재는 다세대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지만, 아현동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할 때는 초가집, 판자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공동묘지가 넓게 있었기 때문에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면 해골들이 즐비하게 나왔다. 그때 판잣집과 함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빨간 양기와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렇게 80년대 말까지 현재의 부동산 앞길은 리어카 하나가 겨우 지나가는 좁은 길이었다. 그리고 80년대 말에 마을 재개발이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현재의 건물들과 다세 대 집들이 들어서게 된다.
70년대 이전 아현동에 들어온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산7번지에는 호박밭이 있었다고 하며, 물이 귀해 물 긷는 것도 큰일이었다고 한다. 동네에 불량배들이 많아 인근 지역에 악명을 떨쳤다고 한다. 심지어 경찰서에 끌려가더라도 산7번지 출신이라고 하면 ‘뺨을 한 번 더 맞았다’라고 할 정도였다. 또한 산7번지, 산8번지 등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동네지명만 대도 못사는 사람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정도였다.

김기찬 사진작가 자료 : 공덕동-1980년


김기찬 사진작가 자료 1980년

2) 마포아파트
60년대 초반에 새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아파트인 마포아파트의 모습이 있다.
그에 반해 그 옆에는 단층짜리 주택과 기와집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도중고등학교에 다녔던 학생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미지는
50년대의 공덕동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공덕동 철뚝길위에서 자신이 다녔던 학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이 일대가 판자집이나 군대막사 같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높은 건물은 역시 학교 건물로 동도중고등학교의 옛날 모습이다.

3) 아현동의 우물
아현동에는 우물도 많이 있었는데 이는 수맥이 북악에서 아현을 지나 복개된 창전로쪽으로 지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103번지에는 말똥우물이, 말똥우물은 우물의 빛이 누루스름해서 말똥같다 하여 붙여진 것인데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
양정중고등학교 뒷산에는 삼태우물, 삼태물로 불렀는데 삼태기처럼 생겨서 붙여진 명칭이다.
서아현파출소 앞에 파마우물,
산8번지에 쌍우물,
소의초등학교 후문께에 까치우물은 까치가 마시는 샘물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수량이 매우 적었다.
너럭바우 밑에는 너럭바우샘이 있었으며 그외 호박밭 약물터·회나무우물도 있었다.

4) 활인서(活人署)
아현동에는 활인서가 있었다. 아현동 267번지·281번지 일대로 아현중고등학교·아현직업학교·아현초등학교 자리이다.
지금은 모두 복개된 선통물천은
마포에서 사대문 안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던 물길이다.
일제강점기에 인공터널을 뚫은 데다
1960대 도시정비 사업으로 복개돼 물길이 사라져 지금은 하수·우수통로로 쓰인다
.
5)「선통물천」
옛날 애고개쪽에서 마포(항)로 흐르는 개천을 거슬러 각종 삼남의 물품이 들어와 장안으로 반입되었으면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
옛날 마포항에 많은 물건이 들어오면 애오개쪽에서 마포 포구로 흐르는 개천을 먼저 거슬러 올라온 다음 장안으로 반입되었다. 즉 물건이 먼저 통과하는 개천[先通物川]이라는 뜻인데 이후에 먼저 선(先)자가 착할 선(善)자로 바뀌어 있으며, 일제 시대에는 지금의 봉원천 쪽으로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렸다. 개천은 북아현동에서 아현시장을 통해 선통 물천을 지나 마포쪽으로 흘러 한강으로 통해있다.
선통물천 준설공사 모습 (1964년)
아현동 언덕마을에는 통운물자를 하역하는 짐꾼과 관리인들의 사택이 있고 마굿간과 목동들도 기거하여 ‘마루보시’로 통했다. 마루보시 마을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피난민과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시민들의 터전이 됐다. 이 일인 통운회사는 나중에 ‘조선운송’으로 해방을 맞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국영관리로 넘어갔다가 대한통운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CJ대한통운으로 팔자를 고쳐 국내 최대이자 글로벌 물류전문으로 한국형 택배(宅配) 비즈니스를 상징한다.

6) 봉학산
봉학산은 중구 만리동과 마포구 아현동 경계에 있는 북한산줄기에 해당한다.
아현동의 역사는 짧지 않다. 이미 조선 시대에도 어엿한 행정구역으로서 존재를 했었다.
서대문 사거리에서 종근당 빌딩을 지나 마포대로로 넘어가는 고개를 애오개라고 한다. 새로난 길들 때문에 원래 모습은 사라졌다고 한다. 애오개를 한자로 풀면 ‘아현(阿峴)’이 되고, 현재 행정구역명인 아현동이 되는 것이다.
야산으로 정상은 만리재길의 만리동 고개 북쪽에 있는 환일중고교가 위치하고 있다. 북동쪽에는 죽림동시민공원으로 삼각점이 있으며, 동쪽에는 양정중고등학교가 있었으며, 지금은 손기정 기념공원으로 바뀌었다.
봉학산으로 불리던 지역이며 현재도 주택가가 밀집된 고지대로서 옛부터 불리던 지형적인 유래를 도로명으로 하여 길 이름을 부여하였으며, 만리재 북쪽에는 봉황과 학이 내려와 도성을 바라보았다는 봉학산(鳳鶴山)이 있는데, 지금은 꼭대기까지 집들이 들어서 있다.
현재 환일고교가 정상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곳이 봉학산의 정상으로 되어있다.
7) 공덕시장
공덕시장의 시초는 마포나루를 통해 남대문시장을 오가는 상인들이 모여 생긴 장터이다. 직접적인 전신은 1949년도에 설립된 한흥시장(漢興市場)이다.
한흥시장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며 본격적인 부흥기를 맞이하였다. 한흥시장은 공덕동 일대를 아울러 600개가 넘는 점포가 들어서며 남대문시장과 견줄 정도로 성장했다. 최전성기에는 발디딜 틈 없이 장보는 사람들로 붐볐고 없는 것 빼고 모든 물건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돼지갈비라는 개념도 한흥시장에서 처음 등장하였다고 한다.
1960년대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공덕동 주변이 개발되기 시작하자 한흥시장의 규모도 축소되었다. 한흥시장이 있던 자리에 마포 아파트가 들어서고 상가 건물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한흥시장의 입지가 곤란할 지경으로 축소되자 1968년에 원래 땅 주인이 지금의 위치에 건물을 세워 공덕시장을 설립한다. 나중에 마포시장이 설립되어 두 시장이 공존하게 되고 지금까지 이어진다.
1950년대에 미나리꽝을 매립하여 천막, 판자집 같은 것으로 점포를 만들어 시장을 형성했다. 청과류와 해산물이 주로 팔리고 있었는데 1968년에 땅주인이 2층 건물을 짓고 ‘한흥시장’이라 하여 진짜 시장이 되었다고 한다.
8) 마포나루
마포나루는 조선시대 한양에 물류를 공급하던 주요 항구 중의 하나였다. 항구들에는 ‘마포나루’만 있는 게 아니라 경강(京江)이라고 해서 송파나루·뚝섬나루·두모포·동작나루·용산항 등도 포함하였다. 이 중 다섯을 골라 오강(五江)이라 했다. 경강(京江)은 상인들을 중심으로 경강상인(京江商人)을 일컫는 말이고, 오강은 항구(나루)를 중심으로 일컬은 말이다.
옛 마포나루가 서울의 물류공급기지였다면 믿을 수 있을까? 서해안에서 산출되는 온갖 물산이 한강을 거슬러 뱃길로 들어왔다면 이해할 만하다. 1800년대 말 마포나루의 모습이다. (사진출처 : 민족의 사진첩. 서문당. 1994)
그 중 마포나루는 한양 서부의 물류를 공급하던 항구인데 주로 서해안과 한강하류 물길을 통해 들어오는 물류가 집중되어 한양에 공급되었다. 반면 한강의 동부에 위치한 항구들은 내륙의 물산을 한강상류에서 뗏목을 이용해 공급하던 나루였다. 이들 나루들은 조선 초기에는 시전(市廛)에 물류를 주로 공급했으나 곧 난전(亂廛)이 발달하자 이곳에 더 많은 물류를 공급하였다. 그리고 난전들은 시전에 대해 중간 도매상 기능도 더하게 되었다.
시전(市廛)은 본래 조선 초기 서울 종로, 남대문로 양편에 관립상가로 건립되어 관에 물품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도성민들에게도 생활물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진·병자 양란 이후 난전이 급속하게 발달하자 시전상인들에게 이른바 금란전권(禁亂廛權)을 부여하여 난전과의 치열한 상권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러던 한양의 상권은 조선 후기에 이르자 사설시장의 발달과 함께 3개의 상권으로 재편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시전(市廛)으로 기존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이현(배오개)시장(梨峴市場)과 칠패시장(七牌市場)이다.
이현시장은 한양의 동부 상권을 장악하고, 칠패시장은 한양 서부의 상권을 장악하게 된다. 배오개시장은 현재의 광장시장 부근에 형성되었으며 앞서 언급한 한강의 동부 나루에서 들어오는 물류가 집중하게 된다. 칠패시장은 마포, 용산, 동작나루를 거쳐 들어오는 물류의 집산지가 되는데 지금 이야기하는 마포시장의 근원이 된다.
아무튼 배오개시장과 칠패시장은 역할이나 물류에 있어서 차이가 나는데 이는 ‘동부채 칠패어(東部菜 七牌漁)’란 말로 설명된다. 말하자면 동쪽 시장인 배오개장은 한강 동부 나루에서 들어오는 시탄·채소·의류·목면·미곡 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칠패장은 남대문 밖과 서소문 사이, 만리재 아래에 형성된 시장으로 어물·미곡·포목 등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붙여진 말이다.
그 칠패장이 개화기 이후 경인·경부 철도가 들어오고 서울역 일대가 철로로 가로막혀 물류의 이동이 단절되면서 쇠퇴하게 되는 한편 도성 안의 남대문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시장은 이동하게 된다.
한편 마포 일대의 지형도 변화하면서 나루터는 점차 매립되고 공덕동 로터리까지 들어왔던 뱃길도 밀려나게 된다. 전차가 들어오면서 ‘마포종점’이 마포나루터를 대신하고 마포시장이 있는 일대는 강변이 아니라 내륙이 되어 시장을 형성하게 된다. 더불어 새우젓시장인 마포나루의 배후 염리동도 소금장에서 쇠퇴하게 된다.
그런데 요즘 ‘전통시장’이니 ‘마을장’이니 해서 가 보면 어찌하여 모두 골목에서 형성되었을까? 시골 장터처럼 넓은 터를 가지고 시장이 형성된 곳은 많지 않으니 말이다. 대한제국 시기, 전차가 들어오기 직전 종로나 남대문로에는 소위 ‘가가(假家)’라는 임시점포가 도로를 점령하여 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전차가 들어오고부터 골목으로 밀려들어 시장으로 변모한 것은 아닐까. 그러니 요즘 골목시장은 생활밀착형이다.
1950년대 아현동 김장시장

아현시장
아현시장은 일본 강점기 시절 굴레방다리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서대문에서 신촌으로 빠지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북아현동, 아현동으로 시장을 양분했다. 아현시장은 6.25 이후 급속도로 발전된 시장으로 과거에는 남대문 시장보다 규모가 컸다. 아현동은 서대문구와 마포구의 분지 역할을 하는 곳으로 260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있다.
1900년 마포나루터의 모습

새우젓시장 등 나루터의 상권이 모여있던 선착장 주변의 모습.
마포나룻터가 모든 생활용품과 전국 이동하는 길목 이였다.
남한강, 북한강에서 한강으로 도성(4대문)과 마포나루가 이어지던 길목에 있던 아현을 전국을 대표하는 지명으로 보았던 것으로 마포 나루장터에서 새우젓이 아현시장을 번영하게 하였다.

1957년경의 아현동 시장의 김장철의 장면
아현동 시장은 서울의 작은 시장에 물품을 분배하는 곳이었다.
기록에 보이는 중앙상단에 보이는 건물이 옛 아현동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김치거리를 파는 상인들의 모습. 양철대야는 이미 사라진
옛 추억의 물건들
아기를 업은 한복차림 모습



옛날에는 겨울철을 나는 김장과 땔감을 저장해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연탄이 없던 시절에서
산에서 나무를 하여 지게 실어 날랐다.
그리고 50-60년대 시절에는 배추 값은 엄청 비쌌다.
합니다


1957년 소달구지에 무를 잔득 싣고 가는 김장철. 그 당시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모습.
(인터넷의1957년도 김장철 사진)

위의사진 자료 1957년인지,1963년인지, 두가지의 추측이 있다.
아현시장 김장시장.
위의사진 자료1970년 김장철 재래시장
위의사진 자료1980년 김장철 재래시장



1930년대 전반 경성형무소 앞. (마포구 제공)
지금 서울서부지방법원 자리에 있었던
흑백으로 찍힌 경성형무소의 장면이다.
1912년 지어진 경성형무소는
항일 독립 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른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1963년 안양교도소로 이관되면서 문을 닫았다.


이 항공사진은 지도상으로만 확인이 가능했던 일본군영지 일대의 공간배치와 지형변화를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기회를 마련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사진의 위쪽으로는 조선총독부 신청사가 자리한 경복궁 일대를 포함하여 서울 도성 안쪽의 중심가가 한꺼번에 포착되어 있고,
서쪽으로는 지금의 서울서부지방법원이 있는 경성감옥(마포형무소)과 인근의 주변 지역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출처: http://ibuild.tistory.com/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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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아현동


1947년9월 26일 :균명중학교로 개교


1차 확장공사 끝난 1972년 만리동 고개의 옛 모습. 이 길이 뚫려서 서울역에서 공덕동, 마포로 가는 길이 빨라졌죠. 1974년 3월 1일 : 환일중학교로 교명 개칭
68년 아현고가 개통


1958년 공덕동에서물지게로 물을 길러 나르는 장면

물급수

70년대 공덕역오거리

70년 공덕오거리

79년 공덕동거리
1900년 우물

1900년대 마을의 우물가 풍경

1900년대 마포 빨래터
동네 빨래터


1960년에서 1970년대 빨래터
공동빨래터와공동우물에서 빨래하는 모습. 뒤에 보이는 기와지붕은 우물을 보호하기 위한 것

